아산 삽교호 삽교방조제 천주교 성지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

주소 :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공세리성당
041)533 – 8181
충청남도 기념물 144호
1895년에 시작된 126년의 역사를 가진 성당
1895년 6월 드비즈가 설립2005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 선정

 

                                                                                                              공세리 성당 입구

서울에서 하루 바람쐬러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서평택IC에서 나와 삽교방조제를 건너면 위치한다.
삽교호 삽교방조제와 삽교호 함상공원, 공세리 성당 건너편 솔뫼성지까지 가볍게 드라이브 하면서 갔다올 수 있는 곳이다.

 

                                                                                                        공세리성당 주차장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의 좁은 동네길을 100여m 지나면 오른쪽에 자리잡은 공세리 성당이 나온다.
나즈막한 언덕에 위치한 아담하고 아름다운 성당이다. 예전 바다를 거쳐 들고나는 교통이 좋아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저장하던 조창인 공진창이 있던 자리다.

 

                                                                                     공세리성당 안내판

 

공세리 성당(貢稅里聖堂)

공세리는 원래 조선시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했던 조창(漕倉)인 공세창(貢稅倉)이 있던 자리이다. 17세기부터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세금을 베 또는 돈으로 내거나 사선(私船)을 임대하여 직접 경창(京倉)으로 운반함에 따라 점차 조창의 기능이 약화되다가, 19세기 고종 때 폐지되었다. 마을에는 지금도 조운의 책임을 맡았던 해운판관 등 관리들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들과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어 조창이 운영되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1890년 천주교 조선교구는 내포 지역인 예산 고덕 양촌과 교우촌이 있던 간양골에 성당을 설립하고 각각 퀴를리에(L. Curlier)[레오] 신부와 파스키에(P. Pasquier)[베드로] 신부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 때문에 퀴를리에와 파스키에 신부는 교구장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파스키에 신부가 병이 들어 홍콩으로 요양을 떠나는 바람에, 1895년 간양골성당을 아산 공세리로 이전(移轉)하였다.

초대 공세리성당 주임으로 임명된 에밀 피에르 드비즈(Emile Pierre Devise)[한국명 성일론(成一論)][1871~1933] 신부는 부임 1년 만에 명동성당[교구청]의 당가(當家)[사무처장] 신부로 발령을 받았고, 후임으로 기낭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런데 기낭 신부 역시 1년 만에 공주본당 창설을 위해 유구 요골[명곡리]로 전임(轉任)하여, 드비즈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다시 부임하였다. 이후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총 35년간 재임하면서 열정적인 선교와 사목(司牧) 활동을 벌여서 지역 천주교회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드비즈 신부가 먼저 한 일은 공진창 터를 매입하여, 1899년 8월에 한옥식 성당을 건축한 일이었다. 그리고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공세리성당은 대전교구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으로, 이후에 지어진 합덕성당[1929년], 예산성당[1934년], 공주 중동성당[1936년] 등 다른 성당의 건축적 모델이 되었다. 또한 공세리성당은 주변 자연 환경과 어우러지며 풍기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아산 지방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내포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그 터전이 넓은 데다가 신자 수 또한 어느 지역보다 많아 오랫동안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교회 조직의 재건과 확대를 위해 내포의 중심 지역에 천주교 성당[본당]을 세운 것이다. 1890년에 양촌과 간양골에 두 개의 성당을 세웠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으로 1895년에 선교를 위한 입지 조건이 훨씬 좋은 공세리로 간양골성당을 이전하게 된 것이다.

1922년에 지은 성당과 사제관은 지역의 명물이 되었다. 1970년에 성당 내부의 목재 기둥과 북측의 제대가 있는 곳을 헐고 ‘T’ 자형의 ‘성 안토니 십자형’으로 증축하였다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아산시의 지원을 받아 2001년 성당과 옛 사제관을 원형대로 복원하였으며, 새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사업 등도 병행하여 2년 뒤인 2002년 10월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8월에는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였다. 2008년 9월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공세리성당의 기원과 성전 건축, 박해와 순교자, 6·25전쟁 때의 고난 등을 중심으로 특화시킨 아담한 공세리 성지박물관을 개관하였다.

드비즈 신부는 1897년 공세리에 두 번째 부임하면서부터 장차 큰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 서울과 인천의 수녀원과 고아원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으로 논과 밭을 매입하여 운영하였다. 공세리 1구 주변에 10만 평[33만 578㎡] 이상, 밀두리[생원장]에 논 10여만 평 이상, 영인면 창용리[당개]의 논과 밭 10만 평 이상, 그리고 염전 등을 소유하였다. 이 땅은 천주교 신자들과 착실한 외교인들에게 소작을 주었고, 넓은 지역에서 받은 소작료는 성당 건축은 물론 성당 운영에 큰 보탬이 되었다. 또한 흉년이 들 때면 소작료 탕감은 물론 기아에 허덕이는 지방민들에게 구호의 혜택을 베풀 수 있는 재정을 만들었고, 그 밖에도 조성학교 설립, 공원묘지 조성, 극빈자 구제, 고아원 운영 등 사회사업과 문화사업에 활용하였다.

일제강점기 거의 모든 지주들이 5할 이상의 소작료를 징수한 데 비해 성당의 소작지는 4할 이하의 적은 소작료를 받았으므로 신자들은 기꺼이 성당의 소작농이 되었고, 이는 비신자들의 입교를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공세리성당의 토지 매입 목적은 경제적 기반 마련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지만, 성당이 중심이 되는 신앙공동체의 건설이 또 하나의 주요 목적이다. 그러나 광복 후 1950년 4월부터 대한민국 전체 농토를 대상으로 시작된 농지개혁으로 공세리성당 소유였던 논과 밭 수십만 평이 소작인들에게 유상 분배되었기 때문에 성당의 대토지 소유는 사라졌다.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물론 신자들의 육신건강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당시엔 피부에 종기(腫氣)가 나는 병이 많았는데, 드비즈 신부는 프랑스에서 배우고 익힌 방법으로 원료를 구입하여 1906년에 고약(膏藥)을 제조하여 신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이 고약은 드비즈 신부의 한국식 이름을 따 ‘성일론 고약(成一論膏藥)’이라 불렀다. 이 고약의 제조법을 인천에서 온 가난한 신자 이명래가 배우게 되었다. 이명래는 드비즈 신부에게 배운 것에 열성적인 연구를 더해 ‘이명래 고약’을 만들었고,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가 중림동 약현성당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종기 치료를 위해 방문하였고, 그중 약효를 경험한 일본군 육군 대좌 사사키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그 약효를 기고하여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광복 후 명래제약을 세워서 계속 발전하였지만, 항생제의 발달과 의료보험의 확대로 인해 1980년대 이후 고약 제조 산업은 점차 쇠퇴하였다.

공세리성당은 2019년 현재까지 23대의 주임 사제를 거치며 오랜 세월 동안 질적·양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10여 명의 사제와 10여 명의 수도자를 배출하였고, 공주성당, 안성성당, 온양성당 등을 분리함으로써 경기도 남부와 충청남도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리고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다하였다. 간혹 성당 밖으로 나가서 천주교 신앙 축제인 ‘성체 거동’ 행사를 열어서 지역의 중심 교회로서 그 위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의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공세리성당은 고딕 양식 건물로 분류된다. 아치형 천장, 버팀벽, 종탑으로 구성되는 고딕 양식은 원래 석조 건축 양식이었으나, 한국에서는 벽돌을 이용한 간략화된 유사 고딕의 형태로 지어져서 ‘고딕 양식의 한국적 재현’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성당 외부의 정면 꼭대기에 뾰족하게 4층 높이까지 솟아 있는 종탑은 하얀 비둘기와 천사를 연상시키는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 내부의 북쪽 벽에는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사용하던 제대(祭臺)가 붙어 있고, 그 이후 현재까지 신자들을 마주보고 사용하는 제대가 그 앞쪽에 있다. 남쪽에 입구가 있으며, 출입구와 모든 창문은 반원 아치로 되어 있다.

공세리성당은 한국관광공사가 2005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선정하였고, 한 해 2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와서 신앙과 역사를 느끼고 체험하는 장이 되었다. 순례와 피정(避靜), 캠프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종합 문화 공간이 된 것이다. 300년 이상 되는 큰 나무들이 성당의 풍취(風趣)를 더욱 북돋아 주는 공간에서 그동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하여 7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 뮤직비디오가 촬영되었고, 사진작가들이 단골로 와서 작품 사진을 찍는 명소가 되었으며, 가수와 미술가들이 찾아와서 마음의 위안과 영감(靈感)을 얻어가는 힐링의 장소가 되었다.

공세리성당의 역대 주임 신부는 1대 드비즈[1895~1896]-2대 기낭[1896~1897]-3대 드비즈[1897~1931]-4대 콜랭[1931~1937]-5대 김성학[1937~1938]-6대 정규랑[1938~1949]-7대 베르트랑[1949~1950]-8대 뷜토[1950, 북한군에게 납치·순교]-임시 주임 신종오[1951~1953, 온양성당 주임]- 9대 이인하[1953~1958]-10대 세라장[1958~1961]-11대 박노열[1961~1965]-12대 파일러[1965~1968]-13대 김동욱[1968~1974]-14대 윤석빈[1974~1980]-15대 여충구[1980~1985]-16대 변갑철[1985~1990]-17대 김인수[1990~1992]-18대 유재식[1992~1998]-19대 강현식[1998~2003]-20대 오남한[2003~2010]-21대 김찬용[2010~2014]-22대 김수겸[2014~2017]이 역임하였으며, 2019년 4월 기준 23대 박지목[2017~ ]이 맡고 있다.

관할 공소들을 제외한 공세리성당만의 신자 수 추이를 보면, 1896년 183명이었던 신자 수는 1920년대 400여 명, 1940년대 900여 명, 1960년~1970년대 2,000여 명으로 늘었다가, 1980년대부터 농촌 인구 감소와 함께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여 1995년에 1,700여 명이 되었고, 2000년대에는 1,400여 명 이하가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한 내포 지역에서 일찍 터를 닦아 12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공세리성당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함께 한 민중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 후기까지 국가의 중요한 세곡 운송 창고였던 공진창은 19세기 말에 폐지되고 말았지만,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드비즈 신부에 의해 천주교 신앙의 창고로 거듭나게 되었다. 일제의 지배라는 암울한 터널을 지날 때도, 6·25전쟁으로 인해 다시 찾아온 박해에도 믿음은 마르지 않았고, 공세리성당의 신앙 공동체는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켜냈다. 공세리성당 건물은 충청남도 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서 중세의 서양 고딕양식 건축 문화를 한국식으로 발전시킨 유형으로 이후 다른 성당 건축의 모델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세리성당 [貢稅里聖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리성당 주차장에 주차하고 코로나19바이러스 체크를 하고 성당으로 올라간다.
예전에 영인면에 있는 맥도날드 배송센타를 한달에 한두번올때마다 자주 들렸던 곳이다.

 

성당입구에 들어서면 높이21m 둘레3.9m의 300여년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서있다.
여기저기 가지가 잘려져 모양은 초라하지만 연륜은 나무크기가 보여준다.

 

             성당의 이정표를 자세히 안내해 주는 표지판이다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 끌어 성당으로 올라간다.

                                                                                     공세곳창지와 천주교회

느티나무 옆에는 “공세곳창지와 천주교회”의 표지석이 있다.
원래는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던 곳창지인 공세창이있던 자리로 공세리성당이 세워지게된 내용을 적고 있다.

 

느티나무 뒷편으로 피정의 집과 사제관이 보인다.
성당으로 박물관으로 해서 한바퀴 돌면서 돌아 보련다.

 

느티나무를 지나 오른편은 공세리성당으로 오르는길이다.
정면으로 오르면 성모마리아와 성요셉 예수님이 함께하는 성상이 자리한다.

 

 성상앞에 가볍게 기도하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간다.
하늘을 덮을듯이 커다란 느티나무가 파란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성상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에는 두개의 비가 서 있다.
복자안드레아김대건순교백주년기념비와 성에밀리오일륜신부공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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